인간에게 기억이란 대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생에서 기억을 완전히 걷어내 버린다면 그것을 과연 온전한 한 사람의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지금 이렇게 리뷰를 쓰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이 순간조차도, 사실은 내 머릿속 어딘가에 하나의 기억으로 차곡차곡 저장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만약 자신이 살아온 지난 삶 전체와, 그 삶 속에서 스쳐 지나가거나 깊이 마주했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어느 날 갑자기 통째로 사라져 버린다면, 그것은 대체 어떤 느낌일까. 상상만으로도 아득하고 두려운 일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상실, 즉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그것을 되찾기 위한 여정을 다룬 판타지 소설이다. 쌍둥이 남매인 제시카와 올리버는 크세사노상이라는 신비로운 조각상과 함께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린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마저 함께 사라지고 있는 위기 속에서, 그 수수께끼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일종의 모험을 떠나게 된다.
올리버는 아버지가 예전에 그러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아버지가 사라져버린 미지의 세상 속으로 직접 몸을 던져 뛰어든다. 반면 현실 세계에 남겨진 제시카는 시간이 흐를수록 오빠 올리버에 대한 기억마저 점점 희미해져 가는, 더욱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런 제시카는 박물관에서 일하는 미리암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고, 그녀와 함께 마치 탐정처럼 흩어진 단서들을 하나씩 짜 맞추어가며 사라진 진실을 추적해 나간다.
한편 올리버는 자신이 발을 들인 낯선 또 다른 세상에서 여러 신비로운 인물들과 조우하게 되고, 그들과 힘을 합쳐 새로운 세계의 규칙 안에서 아버지를 되찾기 위해 크세사노라는 존재와 치열한 사투를 벌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올리버가 그 낯선 세상에 점점 더 깊이 적응해 가면 갈수록, 현실 세계에 남아 있는 제시카의 머릿속에서는 오빠 올리버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지워져 간다. 이 설정이 이야기 전체에 팽팽한 긴장감과 애틋함을 동시에 불어넣는다. 오빠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그 순간에도, 정작 자신은 오빠의 존재 자체를 서서히 잊어가고 있다는 이 잔인한 아이러니가, 이야기를 읽는 내내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짓눌렀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제대로 기억조차 할 수 없게 되어버린 아버지의 존재를 되찾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제시카와 올리버 남매의 노력은, 판타지라는 장르적 외피를 두르고 있음에도 그 안에 진한 가족애와 따뜻한 정감을 담고 있다. 낯선 세계와 신비로운 존재들, 조각상과 얽힌 수수께끼 같은 판타지적 장치들 사이사이로, 결국 이 소설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정서는 서로를 향한 가족의 사랑과 그리움이라는 지극히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감정이었다.
소설 속에서나 벌어질 법한 허구의 이야기이지만, 만약 현실에서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세상은 참으로 암울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서서히,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이 지워져 간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비극이다. 그런 상상을 하다 보니, 지금 당장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쌓아가고 있는 평범한 일상의 기억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새삼 되새기게 되었다.
현대인들에게는 다소 낡고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우리 옛말에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이 있다. 옛것을 잘 익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깨우친다는 뜻이다. 그런데 요즘처럼 빠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정보와 변화를 좇아가기에도 정신없이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옛것을 되새기는 여유는커녕 당장 눈앞에 밀려드는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기에도 벅찬 것이 현실이다. 이 소설은 그런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는 현대인들에게,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이 지나온 삶과 그 안에 쌓여 있는 소중한 기억들을 한 번쯤 되돌아보게 만드는 계기를 던져주는 작품인 듯하다.
현실이 아무리 바쁘고 정신없이 돌아가더라도, 가끔은 한 번쯤 잠시 멈춰 서서 지나간 옛 추억이나 소중했던 좋은 기억들을 조용히 되살려보며,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이 지닌 진짜 의미를 다시 한번 곱씹어보는 그런 기회를 가져보았으면 한다. 이 책이 던지는 잔잔한 울림이, 바쁜 일상에 치여 무심코 지나쳐버렸던 소중한 기억과 사람들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게 만드는 작은 계기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