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 웰던의 《에덴의 악녀》를 덮으면서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남자로서, 이 책이 그려내는 남성상 앞에서 나는 쉽게 결백을 주장할 수 없었다. 남자들은 저마다 입을 모아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정도의 차이일 뿐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 어딘가에는 편견과 속물근성이 자리하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 불편한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고, 그래서 더더욱 부끄러웠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크게 셋으로 압축된다. 전형적인 속물근성을 지닌 남편 보보, 그런 남편에게서 외모만으로는 인정받지 못하는 현모양처형 아내 루스, 그리고 보보에게 '여자'로서 온전히 인정받는 애첩 메리 피셔. 이 삼각 구도는 낯설지 않다. 오히려 우리에게 익숙하다 못해 진부하게까지 느껴지는데, KBS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사랑과 전쟁〉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이야기 구조와 인물 구조가 그대로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여자를 오로지 외모로만 평가하는 남자, 그런 남자와 대체 어떻게 결혼 생활을 지속해 왔는지 의아할 정도로 지극정성으로 가정을 받드는 조강지처, 그리고 속물적인 남자의 오감을 자극하는 빼어난 외모의 첩. 이 구도는 비단 서양 소설에만 등장하는 특별한 설정이 아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우리 고전에서도 흔히 마주치는 서사이며, 결국 국경과 시대를 초월해 전 세계 어디에서나 반복되어 온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여자로서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언젠가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나 자신을 구원해줄 것이라 믿으며 공주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 이것은 특정한 몇몇 여성만의 특별한 욕망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많은 여성들이 은연중에 품고 있는 공통된 지향점일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 속 루스는 그런 여성으로서의 이상향을 스스로 포기한 인물이다. 대신 가정을 지키고 조강지처로서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쪽을 선택했다. 그러나 보보는 그런 루스를 버리고, 철저하게 자기 자신만의 삶과 여성으로서의 이상향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메리 피셔를 선택한다.
여기서 우리는 보보라는 인물을 손쉽게 비난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조금 냉정하게 현실을 돌아보면, 이는 결코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극단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흔히 마주칠 수 있는 현실이며, 어쩌면 상당수의 남자들이 비슷한 상황에 놓인다면 크게 다르지 않은 선택을 하지 않을까 하는 씁쓸한 생각마저 든다. 그렇기에 보보라는 인물이 단순한 허구의 악역이 아니라,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을 법한 보통 남자들의 초상처럼 느껴져서 더 불편하고 더 뜨끔했다.
작가 페이 웰던은 바로 이런 남자들, 그리고 이런 남자들을 만들어내고 용인해온 사회 전체를 향해 날카로운 일침을 놓기 위해 이 소설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침의 상징적 장치로, 버림받은 여성들을 대변하는 천사 같던 루스를 소설이 진행될수록 정반대의 악마적인 존재로 변모시킨다. 처음의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루스와, 이후 복수의 화신으로 거듭나는 루스 사이의 낙차가 크면 클수록, 독자는 이 극적인 반전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동시에 씁쓸함도 함께 맛보게 된다. 착하고 순응적인 여성상이 얼마나 쉽게 짓밟히는지, 그리고 그 짓밟힘이 어떤 방식으로 폭발할 수 있는지를 작가는 극단적인 형태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다만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웠던 지점은, 루스라는 인물이 변화하는 방향성에 있다. 나는 루스가 자신을 버린 세계와 남편에 대한 복수심으로 화살을 돌리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가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여성으로서의 이상향을 뒤늦게라도 찾아 나서는 방향으로 성장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단순히 치정에 대한 복수극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익숙하고 뻔한 전개다. 오히려 요즘 방영되었던 드라마 〈조강지처 클럽〉에서 오현경이 연기했던 인물처럼, 비록 남편에게 버림받았을지언정 새 여자에게 직접적으로 복수를 가하는 대신 자신만의 삶을 새롭게 개척하고, 여성으로서 스스로 원하던 이상향을 뒤늦게라도 추구하며 홀로 서는 결말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결말이었다면 소설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훨씬 더 깔끔하고 울림 있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복수라는 장치가 지니는 서사적 쾌감과 파괴력은 분명 존재한다. 순종적이던 여성이 자신을 억압해 온 구조 자체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는 모습은 통쾌함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 통쾌함이 결국 또 다른 여성, 즉 메리 피셔를 겨냥하는 방식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인 해방이라기보다 또 하나의 굴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여성이 여성을 향해 칼끝을 겨누게 만드는 구도 자체가, 어쩌면 이 사회가 여성들에게 가장 손쉽게 강요해 온 대립 구도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스쳐 지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오늘날까지도 회자되며 읽히는 이유는 분명하다. 외모지상주의, 속물적인 남성상, 순응과 반항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의 심리를 이토록 노골적이고 신랄하게 그려낸 작품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읽는 내내 불편했고, 읽고 난 후에는 더 불편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야말로 이 소설이 독자에게 남기고자 했던 가장 정직한 감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 역시 한 사람의 남자로서, 그리고 누군가의 파트너로서,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들 앞에서 오래도록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