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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칼날[히가시노 게이고]

by IT BRIAN 2026. 9. 7.

이 책은 잔혹한 범죄와 그 범죄의 희생양이 된 피해자, 그리고 무엇으로도 메워지지 않는 피해자 가족의 슬픔과 고통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읽는 내내 마치 이 소설이 특정 개인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안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정면으로 끄집어내어 화두로 던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끊이지 않고 벌어지고 있는 강력범죄들, 그리고 그로 인해 남겨진 유가족들이 겪는, 그 어떤 방식으로도 온전히 치유되지 않는 슬픔을 떠올려보면 이 소설이 결코 먼 나라의 허구적인 이야기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일들은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서나 반복되고 있는 비극인 듯하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작가가 써 내려간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현실 묘사가 얼마나 생생하고 날카로운지, 마치 우리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사리분별력이 채 자라지 못한 청소년들이 있다. 그들은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한 소녀를 성폭행하고 끝내 살해에 이르게 한다. 더욱 참담한 것은, 소녀가 처참하게 농락당하는 그 모습이 비디오로 촬영되었고, 아버지는 그 영상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 더해, 딸이 어떤 방식으로 유린당했는지를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던 그 아버지의 심정은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다.

나 역시 비록 딸을 두고 있지는 않지만, 자식을 키우고 있는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이 대목을 읽으며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나에게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과연 나는 그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성으로 억누를 수 있었을까. 자신이 없다. 아니, 오히려 억누르지 못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더 자연스러운 반응이 아닐까 싶다.

세상의 모든 인권단체들은 한 목소리로 말한다.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며, 아무리 극악한 악행을 저지른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에 대한 처벌은 오직 법이라는 정당한 절차를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원칙적으로는 지극히 타당하고 옳은 말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 대목에서 늘 하나의 의문을 품게 된다.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만약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이 그와 똑같은 참혹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그때도 여전히 지금과 같은 주장을 흔들림 없이 지켜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사회적으로 그 어떤 아량을 베풀어도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흉악범에 대한 처벌을 사형으로 해야 하는가, 아니면 무기징역으로 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양측이 각자 내세우는 논리에도 저마다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으며 내 안에서 들끓어 오른 분노를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생각은 점점 더 강경한 사형 쪽으로 기울게 된다. 아니, 어쩌면 그 정도로도 부족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고통 없이 순식간에 생을 마감하게 하는 사형조차도, 이런 범죄자들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한 처벌이 아닐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스치고 지나갔다. 차라리 조선시대에 존재했던 능지처참처럼, 말이나 소의 힘을 빌려 죄인의 사지를 찢어 처형하던 그 극한의 형벌이야말로 이런 죄에 걸맞은 처벌이 아닐까 하는 섬뜩한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평소의 나라면 결코 떠올리지 않았을 이런 극단적인 감정을 독자에게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가 지닌 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방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소설을 더욱 깊은 갈등 속으로 몰아넣는 결정적인 요소가 하나 더 있다. 바로 가해자들이 다름 아닌 미성년, 즉 청소년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하듯, 아직 사리분별력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청소년이나 그보다 더 어린아이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법이 상대적으로 더 관대한 잣대를 적용하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끔찍하고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단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죗값을 상대적으로 가볍게 치르게 되는 현행 소년법 체계는, 이 소설을 통해 다시금 깊이 생각해 보게 만드는 지점이었다.

물론 그러한 법 조항이 처음 만들어진 취지 자체는 이해가 간다. 아직 자아가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자신의 확고한 의지가 아니라 순간의 잘못된 판단이나 실수로 저지른 범죄 때문에 남은 평생의 인생 전체를 완전히 망가뜨리게 하는 것보다는, 갱생의 기회를 주고 관용을 베푸는 것이 더 옳다는 선의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그려내는 범죄의 잔혹성과 그 성향을 마주하고 나면, 그러한 선의만으로 이 법의 취지에 온전히 동의하기에는 너무나도 참혹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법의 정당한 심판에 맡기면 마땅한 처벌이 내려지리라 믿었던 피해자의 아버지는, 결국 딸을 잃은 것도 모자라 마치 불꽃놀이 축제에 놀러 갔던 딸의 행동 자체에 잘못이 있었다는 듯한 뉘앙스로 흘러가는 재판 결과를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결과는 아버지의 억눌러왔던 분노에 다시금 불을 지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죽은 딸만 두 번 세 번 억울하게 되는 그 상황 앞에서, 그가 끝내 스스로 칼을 들 수밖에 없었던 심정이 소설을 읽는 내내 절절하게 다가왔다.

물론 개인이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사적인 복수를 감행하는 것은, 자칫 또 다른 폭력과 복수를 끊임없이 낳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원칙적으로는 반드시 지양되어야 마땅한 일이다. 이성적으로는 그것이 옳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 아버지 나가미네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마음 깊이 동조하게 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법이라는 제도가 미처 다 채워주지 못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과 정의감의 영역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될 것이다. 과연 우리는 법이라는 이름의 정당한 절차를 끝까지 믿어야 하는가, 아니면 흔히 말하는 주먹, 즉 인간의 원초적인 분노와 정의를 따라야 하는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질문에 대해 그 어떤 명쾌한 답도 내려주지 않는다. 다만 독자 스스로가 그 방황하는 칼날 위에 서서, 끝까지 스스로 답을 찾아나가도록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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